통증 없는 삶의 대가: 선천성 무통증이 가져온 신체적 파괴

신경과 의사 기 레슈차이너(Guy Leschziner)의 저서 《감각의 거짓말》은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남성 ‘폴(Paul)’의 사례를 통해 통증이 가진 생존적 가치를 조명합니다. 34세 당시 인터뷰에 응한 폴은 두개골부터 발목까지, 몸의 거의 모든 뼈가 부러져 본 경험이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에게 통증은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 그 자체였습니다.

통증은 몸을 보호하는 경고등

폴이 앓고 있는 질환은 ‘선천성 무통증(CIP)’입니다. 통증은 뜨거운 물체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다친 부위에 체중을 싣지 않게 하여 조직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는 필수적인 방어 기제입니다. 그러나 폴과 같은 환자들은 이러한 경고 없이 몸을 사용합니다. 이로 인해 골절이나 상처를 뒤늦게 인지하게 되고, 이미 손상된 부위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면서 증상이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는 결국 관절 변형이나 기능 상실, 심지어 시력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유전자 변이가 차단한 신경 신호

폴의 증상은 ‘SCN9A’ 유전자의 변이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이 유전자는 신경세포에서 전기 신호를 만드는 나트륨 통로 ‘NaV1.7’의 구성 요소를 생성합니다. 이 통로가 기능을 잃으면 손상 부위의 통증 신호가 뇌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 통로는 후각 신경에도 관여하기 때문에, 해당 유전자 변이를 가진 환자들은 통증뿐만 아니라 후각을 상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폴의 아버지는 아들이 처음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권투선수가 되길 바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는 “통증 없는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시에는 몰랐다”고 고백했습니다. 폴은 육체적 고통에 공감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지만, 감정적인 슬픔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은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통증이 없는 삶이 축복이 아닌, 신체적 파괴를 막을 수 없는 위험한 상태임을 강조합니다.